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청와대 습격 사건(1·21 사태)'의 북한 무장 공비 출신 고(故) 김신조 목사가 지난 9일 별세한 가운데, 고인을 포함한 북한 공작원 31명의 침투 사실을 처음 알린 '나무꾼 4형제' 중 한 명이 그의 빈소를 찾은 것으로 전해졌다.
11일 연합뉴스는 "57년 전 그날을 떠올리던 우성제(77) 씨가 잠시 눈을 감았다"며 "우 씨는 고인을 포함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부대 소속 공작원 31명의 침투 사실을 경찰에 처음 신고한 '나무꾼 4형제' 중 막내"라고 보도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지난 1968년 1월 19일 당시 20살이던 우 씨는 형제들과 함께 경기 파주 삼봉산에서 무장 공비들에게 붙잡혔다.
그날 오후 1시께 우 씨가 갈퀴로 낙엽을 모으던 중 8촌 형이 부르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이에 산길을 20∼30m 올라가니 군인 네 명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 씨는 "가까이 가보니 가슴이 덜컹하면서 '아이고, 죽었구나' 싶었다.
보자마자 무장 공비인 걸 알아챘다"며 중위, 하사, 사병으로 계급이 제각각인데 AK 소총과 권총, 수류탄을 하나씩 차고 무장 상태가 똑같았다"고 회상했다.
우 씨가 "추운 날씨에 수고하신다"며 말을 건네자, 공작원들은 "분명히 네 명이 올라왔는데 나머지 두 명은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들은 또 "할 이야기가 있으니 산꼭대기에 있는 본부로 올라가자"고 했고, 형제가 "나무를 해서 저녁에 가져다 팔아야 양식을 사 먹는다"며 버텼는데도 들고 있던 낫을 빼앗아 끌고 갔다.
이후 우 씨 형제의 이름과 가족관계, 파출소 위치 등을 물으며 "우리가 어떻게 보이는지 솔직히 이야기하라"고 물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 사이 우 씨의 6촌 형 두 명도 잡혀 왔다.
우 씨는 "훈련 나온 거 같은데 우리 집에 가서 따뜻한 국이나 먹고 가시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작원 중 한 명은 "우리는 북조선에서 넘어온 지하 혁명당"이라며 "일을 마치고 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는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다는 목표로 북한 개성에서 출발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우 씨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버텼다"며 "(공작원이) '이북은 어버이 수령의 햇살을 받아 온 인민이 골고루 잘 살고 대학도 무료로 보내준다'더라. '거기서 살면 좋겠다.
여기서는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겨우 먹고산다'고 계속 이야기했다"고 했다.

저녁이 되자 공작원들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와 공산당 입당 원서를 건넸고, 우 씨 형제는 서명했다고 한다.
우 씨는 "목숨이 날아갈 위기인데 100장인들 못 써 주겠나"라고 회고했다.
그러자 공작원들은 보상이라며 일본제 손목시계를 주고는 "6개월 뒤에 다시 올 테니 그때 만나자는 증표"라고 했다.
또 우 씨 얼굴을 만져보더니 "제대로 먹지 못해서 말랐다"고 안타까워했다.
공작원들은 이들을 풀어주면서 "신고하면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고 협박했으나, 우 씨 형제는 그 길로 파출소에 들러 경찰에 신고했다.
이후 군경이 소탕 작전에 들어가 차단선을 설치하는 것을 본 공작원들은 신고 사실을 알아챈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시속 10㎞로 행군해 1월 21일 밤 청와대 500m 코앞인 자하문고개까지 침투했으나, 군경과의 교전 끝에 김 목사 홀로 생포됐다.
이후 귀순한 김 목사와 우 씨는 최근까지 여러 차례 왕래하며 인연을 이어갔다고 한다.
우 씨는 무장 공비를 신고한 공로로 경찰관이 돼 지난 2005년 퇴직했다.
김 목사는 생전 여러 차례 "우 씨 형제가 대한민국을 살렸다"며 치켜세우기도 했다.
이날 빈소를 찾은 우 씨는 "지난해 여름 치매를 앓고 계신 중에도 동생을 알아보고 반가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성욱 기자 abc12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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