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 V리그 남자부는 그야말로 ‘대한항공 왕조’ 천하다. 대한항공은 2017~2018시즌에야 처음으로 챔피언결정전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V리그 원조 라이벌 삼성화재, 현대캐피탈은 물론 창단 2년차였던 2014~2015시즌에 첫 우승을 차지한 뒤 챔프전 2연패까지 달성한 OK저축은행보다도 V리그 첫 우승이 늦었다. 늦었지만, 그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2020~2021시즌부터 2023~2024시즌까지 정규리그와 챔프전까지 모조리 집어삼키는 통합우승 4연패를 달성해냈다. 이는 챔프전 7연패(2007~2014)에 빛나는 ‘삼성화재 왕조’조차 이뤄내지 못한 전인미답의 영역이다. (삼성화재는 통합우승은 3연패까지 달성해냈다) 통합우승 4연패로 탄생한 대한항공 왕조에는 많은 개국공신이 있지만, 선수 중에 일등공신을 꼽으라면 3명이 있다. 세터 한선수, 아웃사이드 히터 정지석, 곽승석. V리그 내에서 공수겸장의 면모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지석과 곽승석이 정확하게 리시브를 받아 올리고, 이를 한선수가 상대와의 수싸움을 이겨내가며 다양한 공격패턴으로 경기를 풀어간다. 리시버였던 정지석과 곽승석은 공격 상황에서는 누구보다 날카로운 공격수로 변신한다. 이 세 선수가 항상 코트 위를 든든히 지켜준 덕분에 대한항공의 경기력은 다른 구단들에 비해 기복이 적었고, 결정적인 승부처마다 리드를 안정적으로 지켜냈고, 뒤져있을 땐 이를 폭발적인 힘으로 뒤집어냈다. 2024~2025시즌에도 대한항공의 목표는 명확하다. 통합우승 5연패. 자신들이 세운 신기록을 하나 더 늘리는 것이다. 시즌 전 준비작업도 수월하게 풀렸다.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서 총 140개의 구슬 중 단 5개만을 넣고도 3.57%의 확률을 뚫고 전체 1순위 지명권을 얻어낸 것이다. 기적같은 얻어낸 1순위 지명권은 삼성화재가 재계약을 포기해 다시 트라이아웃에 나온 요스바니 에르난데스(쿠바)로 치환되었다. 7개 구단 최강의 토종 선수층에 폭발력 있는 요스바니가 더해지면서 통합우승 5연패는 뚜껑을 열어보기도 전에 확정되는 듯 했다. 그러나 요스바니는 어깨 부상으로 단 2경기만 뛰고 전열에서 이탈했다. 요스바니의 공백 속에 1라운드를 3승3패, 반타작으로 마친 대한항공은 대체 외인으로 지난 시즌 챔피전 ‘단기 알바’로 고용했었던 막심 지갈로프(러시아)를 데려왔다. 막심 합류 후 2라운드 5연승을 거두며 선두 자리를 탈환하면서 다시금 순항하는 듯 했다. 그러나 3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2024~2025 V리그 2라운드 현대캐피탈과의 맞대결에서 세트 스코어 1-3으로 패하면서 대한항공(승점 25, 8승4패)은 현대캐피탈(승점 26, 9승2패)에 선두 자리를 내줬다. 현대캐피탈이 1경기를 덜 치렀음을 감안하면 격차는 더 벌어질 수 있다. 이날 패배의 조짐은 직전 경기인 지난달 29일 삼성화재전에서도 있었다. 1,2세트를 내주고도 3,4,5세트를 내리 따내며 3-2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어쩐지 뒷맛이 개운치 않은 승리였다. 이날도 삼성화재전과 양상이 비슷했다. 1,2세트를 먼저 내줬다. 1세트는 16-12로 앞서다가 허수봉의 서브 때 리시브가 급격히 흔들리며 연속 5점을 허용해 역전을 당한 뒤 세트를 내줬다. 2세트는 10-10에서 레오에게 서브득점 3개를 허용하며 세트를 헌납했다. 3세트를 따낸 뒤 4세트도 21-17로 앞서며 5세트 승부로 끌고가는 듯 했으나 연속 7점을 허용한 끝에 세트를 내줬다. 대한항공답지 않은 경기력이었다. 단 2경기로 평가하기는 다소 섣부르지만, 2경기에서 패한 세트의 공통점이 있다. 주전 세터는 한선수, 아웃사이드 히터 한 자리는 정지석이 맡았다는 점이다. 배구는 2명이 하는 게 아니라 리베로까지 7명이 하는 것이지만, 두 선수가 대한항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지석은 이날 2세트까지 공격 성공률 18.18%(2/11)에 그쳤고, 리시브에서도 리시브 효율 0%(1세트 1/6 1개 범실, 2세트 0/2)였다. 삼성화재전과 현대캐피탈전 모두 1,2세트를 내줄 때 한선수와 정지석이 선발로 뛰었고, 삼성화재전 3,4,5세트를 따낼 때와 현대캐피탈전에서 경기력에서 반등이 나온 3세트부터는 주전 세터는 유광우, 아웃사이드 히터 한 자리는 정지석 대신 곽승석이 나섰다. 각각 통산 485경기, 359경기를 뛰어온 베테랑인 한선수와 정지석이 2경기 부진했다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인가 싶을테지만,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2경기 연속 보인 것은 분명 이례적인 일이다. 대한항공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은 이날 패배에 과도한 의미 부여에 대해선 선을 긋는 모습이었다. 그는 “현대캐피탈이 우리보다 더 나았다. 서브 리시브가 흔들렸던 게 패인이다”라고 총평했다. 대한항공답지 않게 두 차례나 4점차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세트를 내준 것에 대해 틸리카이넨 감독은 “상대가 세게 밀어붙인 결과다. 선수 누구 한 명을 탓할 수 없고, 감독인 저부터 잘해야 한다. 선수들은 훈련을 잘 해내고 있다. 다음 경기는 달라질 수 있다”고 특정 선수 한 두명의 책임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1985년생 동갑내기인 두 세터 중 대한항공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터줏대감인 한선수가 주로 주전, 유광우가 백업 및 더블 스위치를 맡아서 역할을 수행해왔다. 최근 2경기에서는 유광우가 뛸 때가 경기력이 더 좋았다는 것은 틸리카이넨 감독에게 향후 세터 운영에 대한 고민을 던질 법 하다. 이 역시 틸리카이넨은 확대해석을 막았다. 그는 “두 세터가 최선을 다해 경기를 준비하고 뛰고 있다. 그들만 뛰는 게 아니다. 6명과 함께 뛰는 것이기에 해당 세트의 승패는 두 선수와 다른 선수들이 함께 만든 것이다”라면서 “두 세터가 다른 스타일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선수는 이 팀의 주장이다. 주장으로서 다음 경기에서 중심을 잘 잡아줄 것이라 믿는다”라고 설명했다. 인천=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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