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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의 인생 후반전] 월드클래스에서 명장까지… 韓 핸드볼 떠받치는 윤경신 “다시, 태극마크를 향해”

윤경신 두산 핸드볼팀 감독이 올 시즌 전무후무한 통합 10연패에 도전한다.
동시에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는 꿈에도 도전장을 내민다.
최근 경기도 구리체육관에서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와 만났다.
사진=김두홍 기자
‘어나더 레벨(Another Level).’

한국 핸드볼이 낳은 최고의 별, 윤경신에게 딱 어울리는 수식어다.
2m3으로 깨지지 않는 한국 핸드볼 역대 최장신 타이틀을 가진 그는 김연아, 김연경, 손흥민보다도 일찍 세계를 호령한 월드스타다.
화려한 명성에 안주할 법했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도 두산의 지휘봉을 잡고 커다란 목청으로 코트를 꽉 채운다.
올곧은 핸드볼 사랑 그리고 그곳에서 피어날 핸드볼 발전을 믿고 있기 때문. 그가 뿜어내는 열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길었던 떡잎
핸드볼과의 첫 만남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숭인초 클럽활동으로 시작했다.
손으로 하는 종목에 대한 호기심이 날 이끌었다.
키가 있어서 축구 골키퍼도 생각해봤는데, 그때는 핸드볼의 생소함에 더 끌렸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중학교까지 핸드볼을 했던 어머니는 운동 자체를 말렸다.
굳이 해야 한다면 생계를 위해 인기 종목을 하길 바랐다.
소년 윤경신은 굳건했다.
“이미 기본기가 쌓였던 시기였고, 그 덕에 국가대표라는 막연하지만 꿈도 생겼던 때다.
놓고 싶지 않았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갈수록 키는 무섭게 자랐다.
이를 눈여겨 본 체육 교사가 핸드볼부가 있는 숭덕초 전학을 추천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선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왼손잡이였다는 점도 타고난 메리트가 됐다.
윤 감독은 “어느 종목이든 왼손 쓰는 선수가 드물었다.
공수 모든 면에서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 덕에 실력도 크게 올랐다”고 말했다.
만개하는 재능에 더해진 자신감. 윤경신의 핸드볼 외길 인생은 그렇게 힘찬 출발을 알렸다.
윤경신 두산 핸드볼팀 감독이 올 시즌 전무후무한 통합 10연패에 도전한다.
동시에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는 꿈에도 도전장을 내민다.
최근 경기도 구리체육관에서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와 만났다.
사진=김두홍 기자
◆숨길 수 없던 재능
애초부터 국가대표 꿈은 소박했을지 모른다.
광운중-고려고를 거치며 성장한 끝에,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90년에 대표팀 막내가 되는 쾌거를 맛봤다.
여전히 깨지지 않은 최연소 대표팀 발탁 기록이다.

“막내로 태릉선수촌에 갔더니 10살 넘게 차이 나는 형들뿐이었다.
열심히 주전자를 나를 수밖에 없었다”고 웃은 윤 감독은 “그렇게 매일매일 지옥훈련을 받으니 몸도 훨씬 좋아지고 실력도 일취월장했다”고 회상했다.

바로 그해, 주전은 아니었지만 베이징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시작을 알렸다.
1988 서울 올림픽 은메달 멤버들의 은퇴 러시가 이어지며 자연스레 입지가 늘어났고, 곧장 두각을 나타냈다.
1993년 스웨덴 세계선수권 41골, 1995 아이슬란드 세계선수권에선 무려 86골을 찍어내며 모두 득점왕으로 포효했다.

세계의 시선이 그를 향한 배경이다.
윤 감독은 “1995 세계선수권 이후 여러 해외팀에서 본격적인 오퍼가 들어왔다.
그중 핸드볼 종주국인 독일로 가보고 싶었다.
축구 다음가는 국민 종목일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고민 없이 결정을 내렸다”고 돌아봤다.
그렇게 그는 괴물 영입전의 승자였던 분데스리가 VfL 굼머스바흐의 손을 잡고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갔다.
윤경신 두산 핸드볼팀 감독의 현역 시절 모습. 사진=한국핸드볼연맹 제공
◆외로움을 뚫고, 거목으로
계약을 맺은 1995년 12월은 여전히 한국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익숙지 않은 때였다.
윤 감독은 “어린 대학생이 뭘 알았겠나.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 홀로 간다는 게 솔직히 외롭고 무서웠다.
어머니가 초반에 함께 가주시지 않았으면 금세 포기했을 것”이라고 미소 지었다.
이어 “무엇보다 내 핸드볼이 통할지가 미지수였다.
리그 수준은 얼핏 알고 있었지만, 피부로 느낀 게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동양인 타이틀도 깨부숴야 할 장벽이었다.
지금도 문제가 되는 유럽의 인종차별은 당시 더욱 노골적이었던 게 사실. 윤 감독은 “무시와 편견이 많던 때다.
말까지 안 되니까 현지 선수들은 내가 세계선수권 득점왕이라고 거들먹거린다고 오해하기도 했다.
차가운 시선들을 홀로 견뎌야 했다”고 어려움을 떠올렸다.

오로지 실력으로 장애물을 뚫었다.
굼머스바흐 시기를 거쳐 HSV 함부르크(2006~2008년)에서 분데스리가 생활을 마무리할 때까지 무려 7번이나 득점왕을 차지했다.
여기에 포함된 4연속(1998·1999~2001·2002시즌) 득점왕도 뺄 수 없다.
2023년 5월에서야 한스 린드버그(덴마크)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는, 리그 통산 득점 1위(2905골)를 17년 가까이 지키기도 했다.

그는 “독일어가 조금씩 늘기 시작하니까 확 적응이 됐다.
선수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면서 5년 차에는 팀 주장까지 맡았을 정도”라며 “13년이나 독일 생활을 할 줄은 몰랐다.
벅찬 사랑을 받았기에 가능했다.
특히 독일 교민들께서 날 자랑스러워해 주셨다.
덕분에 굵직한 기록들을 세우지 않았을까”라고 웃었다.

뿌듯한 건 역시 꾸준함이다.
윤 감독은 “지금은 시원섭섭하게도 2위로 밀려났지만(웃음), 통산 득점이야말로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다.
긴 시간 부상 없이 그리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선수생활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최고의 증거”라고 엄지를 세웠다.
윤경신 두산 핸드볼팀 감독이 올 시즌 전무후무한 통합 10연패에 도전한다.
동시에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는 꿈에도 도전장을 내민다.
최근 경기도 구리체육관에서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와 만났다.
사진=김두홍 기자
◆지도자 윤경신
월드클래스로의 도약, 그 정점에서 한국 컴백을 택했다.
“한국 최강인 두산에서 뛰어보고 싶었다.
어렸을 때 동고동락했던 친구, 선후배들과 다시 공을 주고받으며 우승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는 게 이유였다.

현역 황혼기를 보내며 3개의 국내무대 트로피를 맛봤다.
그러고는 머지않아 두산 감독 윤경신으로 인생 제2막까지 열었다.
“감사하게도 팀이 날 믿어주셨다.
코치도 아닌 감독으로 바로 밀어줬다.
덕분에 이렇게 원클럽맨으로 남아있다”고 미소 짓는다.

감독 윤경신의 업적이 현역 시절 못지않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팀을 맡은 2013년부터 지난 시즌까지 통합 9연패를 남겼다.
‘어우두(어차피 우승은 두산)’의 뿌리가 바로 여기다.
올 시즌도 마찬가지, 일찌감치 H리그 정규시즌 1위를 확정했다.
다가올 챔피언결정전에서 10번째 통합 우승을 노릴 일만 남았다.
윤경신 두산 핸드볼팀 감독의 현역 시절 모습. 사진=두산 구단 제공
윤 감독은 “선수보다 감독이 훨씬 어렵다.
선수는 자기 몸만 잘 만들면 되지만, 감독은 전체를 보며 모두를 하나로 뭉치게 만들어야 한다.
화도 많아졌다.
스타 출신은 눈높이가 다르다고 하지 않나. 나도 처음에는 ‘왜 저걸 못하나’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오판도 많다보니 자연스레 선수들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도 펼쳤다.
그 시간이 나를 성장시켰다.
누구보다 선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길을 수정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핵심 테마는 ‘할 때 하자’다.
그는 “코트 위에서는 모든 걸 나한테 맡겨달라고 선수들에게 주문한다.
나도 사사로운 감정은 내려놓고 우리 선수들을 동생이 아닌 선수로만 보려고 노력한다”면서도 “그러다가 비시즌에 코트 밖으로 나가면 편하게 술 한잔 기울이는 허술한 동네 형이 되는 거다.
그런 문화를 10년 넘게 만들려 했다.
매번 우승에 닿는 걸 보면 원했던 대로 우리만의 컬러가 생긴 듯하다”고 미소 짓는다.

통합 10연패 꿈도 부푼다.
윤 감독은 “어깨가 무거운 건 맞지만, 이제는 선수들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단계가 됐기 때문에 부담감도 옅어졌다.
물론 부담이 없다는 말이 우승을 안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10’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는 솔직히 욕심이 난다.
여기까지 왔는데 무너지긴 너무 아깝다”고 껄껄 웃었다.
윤경신 두산 핸드볼팀 감독이 올 시즌 전무후무한 통합 10연패에 도전한다.
동시에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는 꿈에도 도전장을 내민다.
최근 경기도 구리체육관에서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와 만났다.
사진=김두홍 기자
◆가슴을 울리는, 태극마크
그의 눈은 또 다음 페이지를 향한다.
바로 잠시 내려둔 태극마크를 다시 가슴에 품는 것. 2015년에 한 차례 감독직을 맡았던 그지만,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진출 실패라는 뼈아픈 실패만 남기고 물러났다.
10년이 지나 권토중래를 꿈꾼다.

애국심은 이미 정평이 났다.
“독일 시절 소속팀에 휴가를 받아 사비로 일본에서 펼쳐진 대표팀의 아시아선수권대회 겸 올림픽 예선에 나간 적도 있다.
절대 질 수 없는 한일전이었다.
협회에서도 내가 오는 걸 몰랐을 정도였다.
소속팀에서는 욕 많이 먹었다”는 에피소드가 일면을 보여준다.

독일의 귀화 요청 거절도 유명한 비하인드 스토리다.
그는 “굼머스바흐 시절 감독님이 독일 대표팀 감독이 되면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귀화를 제안했다.
메달도 따고,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었지만, 독일 교민들의 응원과 우리 가족들의 사랑 그리고 태극마크를 향한 내 열망을 맞바꿀 수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윤경신 두산 핸드볼팀 감독이 올 시즌 전무후무한 통합 10연패에 도전한다.
동시에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는 꿈에도 도전장을 내민다.
최근 경기도 구리체육관에서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와 만났다.
사진=김두홍 기자
그 마음 그대로, 한국 핸드볼의 부활을 꿈꾼다.
그는 “아직 우리 선수들은 프로의식이 모자라다.
진정한 프로의 모습을 갖추려면 선수들이 진지하고 적극적인 마인드를 탑재해야 한다”는 일침을 전했다.

실제로 한국 남자 핸드볼은 2012 런던을 끝으로 올림픽 본선을 밟지 못해 완벽한 변방으로 밀렸다.
윤 감독은 “아시아에서도 챔피언이 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어린 선수 육성을 위해 조급함을 내려둬야 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이 필요하고, 지도자들도 공부하고 분석해야 한다.
당장의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끈덕지게 선수들을 키우고, 건강한 시스템을 갖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구자가 되는 그림을 그려본다.
그는 “다시 한번 국가대표팀 감독을 생각해봐야 할 때라고 느낀다.
과거 한 차례 겪은 실패를 발판 삼아 10년간 피땀을 흘렸다.
한국 핸드볼의 국제경쟁력을 다시 끌어올릴 수만 있다면 다시 모든 걸 쏟아부을 준비가 됐다”며 진정한 ‘후반전’을 향한 당찬 각오를 띄워 보냈다.
허행운 기자 lucky77@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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